2026.05.21

AI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기업들은 강력한 기대와 동시에 일종의 착시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마치 모든 기업이 같은 속도로 AI 전환을 추진하고 있으며, 잘 설계된 매뉴얼과 자동화 도구만 갖추면 조직이 스스로 움직이는 자율 운영의 시대가 곧바로 도래할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 기업 현장의 상황은 아직 그 기대와 거리가 있습니다. 많은 기업에서 AI는 여전히 문서 작성, 코드 보조, 회의 요약 등 개인 생산성을 높이는 도구에 머물러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도 AI를 도입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막연한 압박이 더해지면서, AI를 어떻게 조직 운영과 비즈니스 성과로 연결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커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기업 내부에서 AI가 실제로 '작동'하기 위해서 어떤 과정이 필요한지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기업이 스스로의 업무를 얼마나 파악하고 있는지, 그 지식 중에 기계가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얼마나 적은지, 그리고 이걸 바꾸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실제 사례를 통해 짚어보겠습니다.
가트너, 맥킨지 등 주요 컨설팅펌과 조사기관은 다양한 AI 성숙도 모델(AI Maturity Model)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모델은 현재 기업의 위치를 진단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방향과 타임라인을 제시합니다. 이러한 접근은 기업이 AI 전환의 큰 그림을 이해하는 데 유용합니다.
다만 실제 기업 환경에서의 AI 성숙도는 단순히 선형적인 단계로만 설명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여러 역량이 층층이 쌓이는 ‘의존성의 적층(Stack of Dependencies)’에 가깝습니다. 아래 단계가 충분히 정비되어야만 그 위 단계의 AI 활용이 가능해지는 구조입니다. 업무 프로세스가 정리되지 않았는데 자율 에이전트를 도입하거나, 데이터 신뢰성이 확보되지 않았는데 AI 기반 의사결정을 추진하면 프로젝트는 데모 단계에서는 가능해 보일 수 있지만 실제 운영 환경에서는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AI 성숙도는 단순한 도입 일정이 아니라 조직 역량의 사다리로 이해해야 합니다. 아래 단계에는 개인의 경험, 파편화된 실험, 업무별 노하우가 존재합니다. 반면 상위 단계에는 스스로 적응하는 시스템, AI 에이전트, 자동 개선되는 워크플로우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둘 사이를 연결하는 중간 단계입니다.
이 중간 단계에서는 업무를 기계가 이해할 수 있도록 명문화하고, AI의 행동을 신뢰할 수 있도록 데이터를 정제하며, 의사결정 구조를 체계화해야 합니다. 이 구간이야말로 AI 도입을 실제 성과로 연결할 수 있는지, 아니면 일회성 실험으로 끝낼지를 가르는 핵심 구간입니다.
많은 기업의 리더들은 AI 에이전트가 복잡한 업무를 수행하는 데모를 접합니다. 문서를 읽고 핵심을 요약해 보고서 초안을 작성하거나, 고객 문의를 분석해 관련 데이터를 조회하고 해결 방안을 제안하는 장면을 봅니다. 자연스럽게 “우리 조직에도 바로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가 생깁니다.
그러나 실제 조직 내부를 들여다보면 상황은 다릅니다. 업무는 여전히 관습과 임기응변에 의존하고, 핵심 노하우는 일부 구성원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암묵지’라는 이름 아래 지식은 문서화되지 않은 채 남아 있고, 팀마다 사용하는 용어와 기준도 다릅니다. 데이터는 여러 시스템에 흩어져 있으며, 공식 조직도상의 결재 라인과 실제 업무가 흘러가는 방식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기업은 개인이 챗GPT나 코파일럿을 활용하는 단계에서 곧바로 자율 에이전트 단계로 넘어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AI 도입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바로 그 사이에 놓인 중간 단계입니다. 이 과정을 건너뛰면 AI는 조직 운영의 일부로 자리 잡기 어렵습니다.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는 고도화된 AI 시스템도 안정적으로 작동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AI 도입과 AI 에이전트 확산을 논의할 때, 회계 코드 표준화나 업무 프로세스 정비와 같은 주제는 상대적으로 주목받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실제 혁신은 바로 이러한 기초 작업에서 시작됩니다.
AI 성숙도는 계단식으로 쌓입니다. 각 단계에서 조직은 새로운 역량을 확보하게 되며, 동시에 이전에는 잘 보이지 않던 조직의 문제도 드러납니다. 데이터가 정리되지 않았다는 사실, 업무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 특정 개인에게 지식이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AI 도입 과정에서 표면화됩니다. 이 불편한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해야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AI 성숙도는 모든 부서가 동일한 속도로 올라가는 경주가 아닙니다. 엔지니어링 부서는 빠르게 AI를 활용하는 반면 재무 부서는 초기 단계에 머물 수 있습니다. 마케팅 부서는 AI로 콘텐츠 생산성을 높이고 있지만, 법무 부서는 검토와 리스크 관리 관점에서 보다 신중하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불균형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회사가 몇 단계에 있는가”가 아니라, “어느 영역이 AI 활용의 병목이 되고 있는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입니다.
AI 성숙도 사다리 (AI Maturity Ladder)
L0 - 관습 (Tribal): 개인의 경험과 습관에 의존해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됨 |
단계별 명칭보다 중요한 것은 각 단계 사이의 전환기입니다. 기업이 실제로 어려움을 겪는 지점도 바로 이 전환 과정에 있습니다.
L1에서 L2로 넘어가는 과정은 많은 기업에 가장 어려운 구간입니다.
L1 단계의 기업은 겉으로 보기에는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챗GPT로 기획안을 작성하고, 누군가는 코파일럿으로 코드를 작성합니다. 역량 있는 직원이 내부용 자동화 도구를 만들어 조직의 관심을 끌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가 개인의 역량에만 의존한다면 조직의 자산으로 남기 어렵습니다. 해당 직원이 이동하거나 퇴사하면, 그가 만든 워크플로우와 노하우도 함께 사라질 수 있습니다. 이는 AI 도입이 아니라 개인기 기반의 생산성 향상에 가깝습니다.
L2로 이동한다는 것은 더 비싼 도구를 도입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조직이 스스로 어떻게 일하는지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과정입니다. 예를 들어 영수증 처리 업무에서 매뉴얼상 원칙과 실제 처리 방식이 어떻게 다른지, 업체마다 다른 항목을 어떤 기준으로 분류하는지, 문서 승인 과정에서 실제 의사결정 권한을 가진 사람은 누구인지 등을 명확히 정의해야 합니다.
많은 지식이 문서화되지 않은 이유는 단순한 실수가 아닐 수 있습니다. 때로는 특정 개인이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남기 위해 정보를 독점하는 구조가 작동하기도 합니다. 업무를 가독성 있게 만든다는 것은 누구나 검토하고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는 의미이며, 이는 권한과 정보의 투명한 분산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이 단계의 핵심 장벽은 AI 전략이나 도구의 부족이 아닙니다. 조직이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직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반대로 이 과정을 통과하면 AI 도입 여부와 관계없이 신입 사원의 적응 속도가 빨라지고, 업무 인수인계가 체계화되며, 조직 운영의 안정성이 높아집니다. AI 도입을 계기로 좋은 조직 관리의 기본을 시작하게 되는 셈입니다.
L2에서 업무 프로세스를 정리했다면, L3에서는 AI를 실제 기업 데이터와 연결하게 됩니다. 고객 관리 시스템, 회계 시스템, 협업 도구 등 내부 데이터와 AI가 연결되는 단계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많은 기업은 내부 데이터가 예상보다 불완전하고 일관성이 낮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데이터 연결은 기술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신뢰의 문제입니다. AI가 아무리 빠르게 답을 제시하더라도 그 결과를 검증할 수 없다면 조직은 그 답에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 단계에서 흔히 발생하는 오해는 RAG와 같은 기술만 도입하면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진짜 장벽은 결과물을 검증할 수 있는 구조가 없으면 아무도 그 결과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반대로 이 단계를 넘어서면 조직은 비로소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를 데이터 기반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1시간이 걸리던 자료 조사가 몇 초 만에 가능해지는 변화도 여기서 시작됩니다.
L4는 AI 시스템이 사용자의 명령을 기다리는 수준을 넘어, 상황을 먼저 읽고 대응을 제안하거나 일부 행동을 수행하는 단계입니다. 예를 들어 서버 로그를 모니터링하다가 장애 가능성을 미리 감지해 보고하거나, 고객 문의가 접수되면 사람이 확인하기 전에 관련 데이터를 조회해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방식입니다.
이 단계가 과장되기 쉬운 이유는 많은 기업이 이를 단순히 ‘똑똑한 비서’를 구매하는 문제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 장벽은 조직 구조에 있습니다. 시스템이 선제적으로 통찰을 제공한다면, 그 정보를 받는 사람에게 행동할 권한도 함께 주어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상담원이 AI를 통해 엔지니어링 문제의 원인을 파악했다면, 단순히 개발자에게 요청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정 범위 안에서 직접 조치하거나 문제 해결 프로세스를 실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단순한 업무 자동화가 아니라 권한 구조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정보가 현장 실무자에게 더 빠르게 전달되고, 일부 의사결정 권한도 함께 이동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리더십이 이러한 권한 이동을 수용하지 못한다면, AI는 통찰을 제공하더라도 실제 실행으로 이어지기 어렵습니다.
이 단계의 핵심 오해는 에이전트만 도입하면 변화가 완성된다는 생각입니다. 실제 장벽은 실무자에게 정보와 권한이 집중되는 변화를 조직이 감당할 수 있는지에 있습니다. 이 과정을 통과하면 병목은 줄어들고, 사람은 반복 작업보다 판단과 예외 처리 같은 고차원적 업무에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L5는 AI 시스템이 실행을 넘어 학습과 개선의 순환 구조를 갖추는 단계입니다. AI가 전문가의 피드백을 받아 자신의 로직을 개선하고, 전문가가 수정한 답변이나 판단 기준이 다시 시스템에 저장됩니다. 이를 통해 조직의 지식은 특정 개인에게 머무르지 않고 지속적으로 축적됩니다.
더 나아가 시스템은 실제 업무 데이터를 바탕으로 조직 운영 방식에 대한 제안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 프로젝트의 진행 속도와 병목 데이터를 분석해 특정 역량을 가진 인력이 더 필요하다고 제안하거나, 채용 공고의 요건을 수정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제시할 수 있습니다. AI가 단순한 업무 보조 도구를 넘어 조직 설계의 파트너로 확장되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 가장 큰 장벽은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수용성입니다. 시스템이 제안한 방향이 기존의 관습이나 직관과 충돌할 때, 리더십은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의 문제가 남습니다. AI의 제안을 어디까지 신뢰할 것인지, 어떤 기준으로 검토하고 승인할 것인지, 최종 책임은 누가 질 것인지에 대한 경영 차원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L5를 자율주행처럼 모든 것이 자동으로 돌아가는 단계로 이해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진짜 장벽은 전문가의 머릿속에 있는 노하우를 다시 시스템으로 피드백하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이 정착되어야 조직의 지능은 개인의 역량을 넘어 기업의 영구적인 자산으로 축적될 수 있습니다.
AI 성숙도의 전 과정을 관통하는 핵심은 분명합니다. 조직을 기계가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과정은 결국 사람이 일하기 좋은 조직을 만드는 과정과 맞닿아 있습니다.
검색 가능한 기록, 명확한 근거, 표준화된 데이터, 투명한 규칙은 AI만을 위한 조건이 아닙니다. 새로 합류한 구성원이 빠르게 업무를 이해하고, 부서 간 협업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며, 의사결정의 근거가 명확하게 남는 조직을 만들기 위한 기본 조건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많은 기업은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이러한 기초 작업을 미뤄왔지만, AI 시대에는 더 이상 이를 회피하기 어렵습니다.
일부 조직이 AI 도입에 저항하는 이유도 AI 자체에 대한 두려움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AI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조직의 무질서와 불투명성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프로세스가 투명해지면 기존 권위가 도전받을 수 있고, 데이터가 명확해지면 숨겨져 있던 오류와 비효율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AI 전환은 기술 프로젝트인 동시에 조직의 운영 방식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경영 프로젝트입니다.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상황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대기업에게 이 과정은 복잡하게 얽힌 조직 구조와 시스템을 재정비하는 대규모 전환 과제에 가깝습니다. 고통스럽고 시간이 걸리지만, 성공할 경우 그 효과는 매우 큽니다. 반면 소규모 팀은 상대적으로 불필요한 절차와 레거시가 적기 때문에 더 빠르게 L3나 L4 단계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들도 성장 과정에서 기록과 체계를 소홀히 하면 결국 대기업과 같은 구조적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결국 AI 시대의 승자는 가장 비싼 AI 모델을 도입한 기업이 아닐 것입니다. AI가 실제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업무를 명문화하고, 데이터를 신뢰 가능한 상태로 만들며, 권한과 의사결정 구조를 재설계한 기업이 될 것입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기초 작업을 꾸준히 수행한 조직만이 AI를 일회성 실험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운영 역량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Writer: Turing Post - Ksenia Se & Ben Eum
Edit: Metanet